죽음 앞에 서서
안녕...이라고 쓰고 너의 이름을 떠올리니
10년
그 시간 동안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님 제가 이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혼자 죽어간 나의 돌돌이
점점 시들어가는 내 친구의 엄마
죽음이란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하지만 그렇게나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겼던 존재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한 우리들의 마음이
그저 한낱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 것들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저 이렇게 숨 쉬다 사라지는 존재들이라면 어떻게 사랑하고 아파할 수 있을까?
떠나간 그들은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어딘가가 좋은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정말 그들이 이곳을 떠나 좋은 곳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입장인 나도 이렇게 슬픈데,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사자들은 어떤 마음일까?
우리가 살고 느끼고 있는 이곳, 이몸을 떠난 세상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상상은 하더라도 확신을 갖고 믿기는 더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생겨난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생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알려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우주와 생명의 시작을 캐는 과학자들의 논리조차도 결국 '가설'일뿐이고,
수많은 '론'을 만든 철학자들도 그저 '만약'일뿐이다.
그들의 가설과 만약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고 빈틈이 있으며 검증을 통과하지도 못했고, 검증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말잔치였을 뿐...
그래서 이제는 어떤 과학자의 연구나 철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결론 낼 수 없는 그 주제들에 더 이상 관심과 시간을 두지 않게 되었다.
메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시간을 잘 낭비하게 만들어진 헛되고 흥미로운 것들로 채우며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른 채, 모른 척 살아가도
모든 인간이 다다르는 한 지점 앞에 오면
모른 척하며 살았던 그것들로 망연해지고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삶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죽음 직전에서야 한 번 더 생각해 보지만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알 수 없는 채로 죽고 마는 것이다.
떠난 자도 모르고, 보내는 자도 모른다.
떠난 자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보낸 자들은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 올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은 채
다람쥐 수레바퀴 같은 그 일상으로 서둘러 돌아선다.
그렇게 죽음은 한 사람을 빨아들인 뒤 잔잔해지는 늪처럼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곳에 있다.